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번의 난 (문단 편집) === 한족 항장 === 만주족은 기본적으로 인구가 매우 적었다. 청나라의 입관 후 [[강희제]] 치세의 인구조사에서 만주족의 인구가 100만이었으니 그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의 총 병력도 10만 명이 안되었으며, 산해관을 넘을 때도 전선에 전개한 총 병력은 6만 명 정도였는데 이것도 홍타이지([[청태종]]) 시대에 병합한 몽골계 병사들을 합한 수치였다. 당연히 당시 인구가 1억 명을 넘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만주족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으므로 청나라는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등 명나라 출신 항장들을 적극 활용했고, 이러한 한족 항장들은 각자의 이유로 이민족인 만주족 측에 투항하여 청나라의 중원 제패를 돕는데 크게 일조했다. 가장 대표적인 항장인 [[오삼계]]는 명 말엽 [[숭정제]]의 지시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자 산해관의 문을 열고, 청나라와 동맹을 맺어 [[이자성]]군을 격파했다.[* 원래 오삼계는 그래도 같은 한족인 이자성 측에 투항하려 했지만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군이 오삼계의 본가를 약탈하고, 더 이상 청나라를 상대하면서 이자성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청나라에 귀순했다.] 이후 오삼계는 [[청나라]]의 화남 정벌에도 앞장서서 [[남명]]의 세력을 모조리 격파하고, 운남까지 진격해서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과 명의 황족들의 씨를 말렸다.[* 이 때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가 죽었는데 그는 살아남기 위해 버마의 국경까지 넘었지만 오삼계 또한 버마의 국경을 넘었고 청군의 위세가 두려웠던 버마가 직접 영력제를 오삼계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오삼계는 영력제와 그 일족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이 소식은 [[동녕 왕국]]을 세운 [[정성공]] 귀에도 들어가 정성공은 이 때 크게 슬퍼하다 1달만에 죽었다.] 그는 이 공로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의 번왕이 되었다.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2%BD%EC%A4%91%EB%AA%85(%E8%80%BF%E4%BB%B2%E6%98%8E)|경중명]]은 본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부하로,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도망 및 뇌물 수수죄로 처형되자 이에 반감을 품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3572&cid=40942&categoryId=34333|공유덕]][* 경중명, 상가희의 동료로써 역시 원숭환 사후 청에 투신하여 병자호란, 입관, 화남 정벌 때 공을 세워 정남왕(定南王)으로써 [[광시 좡족 자치구|광서]]의 번왕에 봉해졌지만 남명의 손가망과 싸우다가 패해 자결했다. ~~공유덕이 살아있었더라면 사번의 난인가?~~ 공유덕의 사위 [[https://zh.wikipedia.org/wiki/%E5%AD%99%E5%BB%B6%E9%BE%84|손연령]]이 광서를 지배하며 오삼계에 붙었다가 나중에 다시 청에 투신하려 하여 살해된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이끌고 있던 수군과 화포 등을 갖고 공유덕과 함께 후금에 귀순한 사람이다.[* 이 때의 반란 때문에 조선도 명으로부터 반란 토벌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 때문에 후금에게 밉보이게 되었고,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우린 너희랑 원수진 것도 없는데 너희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근거로 이를 언급한다.] 귀순 당시 [[청태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총병관의 자리에 올랐고, [[병자호란]] 때에 [[도르곤]] 밑에서 [[강화도]] 공략을 맡았으며 입관 이후에도 화남에서 저항 세력 정벌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정남왕(靖南王)이 되어 복건의 번왕이 되었으나 휘하 관리가 지은 죄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아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9714&cid=40942&categoryId=34333|경계무]]가 정남왕의 작위를 세습했으며 다시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이 이 자리를 세습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9598&cid=40942&categoryId=34333|상가희]] 역시 모문룡의 부하 출신으로 경중명과 달리 모문룡 처형 이후에도 명군에 잔류했으나 원숭환에 대한 반감은 마찬가지였고, 경중명의 반란이 실패하자 반란군이 후금에 귀순할 때 동참하였다. 역시 청태종에게 중용되어 병자호란과 북경 공략에 종군했고, 이후에는 광주 지역 공략에 기여하여 평남왕(平南王)에 봉해졌으며, 광주의 번왕이 되었다. 전술한 항장 3인과 그들의 세력은 청의 중국 통일 과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청의 중국 통일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이들은 [[순치제]] 기간 동안엔 청 조정의 우대를 받았다. 이들이 다스리는 세 개의 번(藩)은 자체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경제적/정치적으로도 상당한 특권을 누렸으며, 2대 정남왕 경계무의 경우처럼 작위의 세습도 가능했다. 청나라 조정은 오삼계의 장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D%91%EC%9B%85|오응웅]]을 [[아이신기오로 아길격|화석건녕공주]]와 혼인시키는 등 삼번왕의 아들들을 청 황실의 공주들과 혼인시켜 우대하는 한편 북경에 머물게 하며 인질로 삼는 일종의 봉건식 견제 체제를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